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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2회]Gungnir |
날짜 : 2014-05-30 01:00 | 조회 : 392 / 추천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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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괴담] 그래, 나는 살아있다. (재밌어요)아침을 깨운 것은 아내의 전화였다. 아내의 목소리는 어쩐지 잔득 상기되어있었다. “당신 돈 붙였어?” 안부는 차 치 하더라도 인사정도는 건넬 줄 알았다. 아내는 다짜고짜 돈 이야기부터 꺼냈다.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나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무슨 돈......” “무슨 돈은 생활비 말하는 거잖아!” 아내의 앙칼진 고함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차, 벌써 생활비를 보낼 때가 되었던가. 기러기 아빠의 한 달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아내와 두 딸은 현해탄 건너 한국에서 내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일본의 식문화와 타테마에에 적응하지 못했던 아내는 아이들의 교육을 핑계로 5년전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나는 줄곧 혼자, 이 차디찬 다다미방에서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다. “미안, 내가 금방 보내줄게, 주급이 아직 안 나왔어.”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치 죄인처럼 아내의 전화를 받을 때면 간수장의 징벌봉이 날아들기라도 하듯 잔뜩 움츠리는 내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내 인생은 버리고, 돈 벌어가는 기계로 돈이라는 젖줄만 연결한 채 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목말라하면서 말이다. 나는 항상 감정에 굶주려 있다. 남자의 인생이 으레 그러하지만, 서러울 때 서럽다고 말할 수 없고, 울고 싶을 때 마음 놓고 울 수 없고, 웃고 싶어도 즐거울 일이 없는 이런 인생.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황무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아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럼 주급 나오는 대로 보내. 오늘도, 민영이 수련회비 내야 되는데 그것도 제때 못 내면 애가 기죽잖아.” “그래, 내가 보내줄게. 애들은 잘 있.......” 뚝.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내의 전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딸 들이 직접 전화를 걸어오지 않은 지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아이들이 방학이 되면 이곳에서 일주일 씩 묵고 가곤 했지만 그마저도 2년전부터는 공부를 핑계로 오지 않게 됐다. 이제 나는 이곳에서 정말로 혼자인 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눈을 감고 있고 싶었다. 자는 동안은 정말 죽은 듯 그런 감정의 허기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시간만이 내게 허용된 아주 적은양의 안식이었고, 그 것마저 없다면 나는, 아마 무서운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더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본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출근시간이 이미 20분이나 지나있었다. 한국에서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곧바로 상사에게 전화가 날아들 터였으나, 일본은 달랐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다가 곪을 대로 곪으면 그때 폭탄을 터트리듯 한방에 끝장을 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테마에다. 문을 나서려는데 택배기사가 붙잡고 늘어졌다. 묵직한 물건이 든 상자였는데, 발신자를 볼 새도 없이 정신이 없는 탓에 대충 사인만 휘갈기고 집을 나섰다. 출근길은 언제나 북적인다. JR노선은 언제나 인파로 붐볐고, 사람들은 지하철이라는 생물의 부속물인 듯 제각기 바삐 움직였다. 신이먀미야역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나는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남자를 실수로 밀쳤다. 그는 뒤로 발라당 넘어갔고, 나는 그를 부축하려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는 내 팔을 밀치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습관적으로 ‘스미마셍.’이란 말과 함께 자신을 밀친 나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갔다. 자신이 잘못 하지 않은 일에도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꺼내는 이곳의 풍습. 쉽게 적응 되지 않았다. 싸울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잘 못하지 않은 일에도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꼴이라니, 행복하지도 않은데, 행복한 척 살아가는 내 처지와 다를 게 없었다. 일본인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국이었으면 직장동료나 동호회회원들끼리 모여 술 한 잔 걸치며 서로가 짊어진 멍에를 어루만져 주었을 테지만 이곳은 그런 문화가 없다. 그런 점이 나를 더욱 더 막다른 길로 몰고 가는 지도 모른다. 내가 언제까지 이 일본 땅에서 버틸 수 있을까. 아이들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아니면 시집을 갈 때까지? 그래 버틸 수 있으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도움이 가족들에게 더 이상 필요 없어질 때까지 그렇게 나는 소모품처럼 열심히 그들의 인생을 뒷바라지 하면 그걸로 내 할 일은 끝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자유로워지겠지. 공장은 내가 없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4번 용광로 관리실에는 직장동료 마쓰자카가 바삐 버튼들을 눌러대고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연배의 40대 남성이었고, 센다이 출신이었는데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하다 쓰나미로 인해 가족들을 다 잃은 불쌍한 사람이었다. “마쓰자카 미안해. 늦잠을 자버렸지 뭐야.” 나는 작업복을 입고, 머리에 안전모를 쓰면서 말했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나도 어느새 이 곳의 타테마에에 노예가 돼버린 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조, 다음엔 내가 늦잠을 자지 뭐.” 마쓰자카는 파- 하며 웃고는 인수인계를 해주었다. 인수인계가 마무리되자 그는 내 어깨를 툭툭치더니 관리실을 나섰다. 그 만의 힘내라는 표현인 듯 했다. 나의 쳇바퀴 굴러가는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관리실에는 빨갛고, 노랗고, 파란 버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내 일은 이 버튼들을 하루 종일 눌러대며 용광로를 관리하는 것이다. 용광로에 들어찬 쇳물을 식히고, 끓이고, 또 식히고, 또 끓이다보면 내 하루는 끝이 난다. 정신을 놓으면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기에 마음을 놓을 수 없지만 그러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면 그런 중압감조차 가볍게 느껴진다. 관리실은 비좁다. 나만의 공간이자, 발 뻗을 공간도 없는 협소한 곳이었다. 점심을 관리실에서 해결해야 될 정도로 바쁜 날에는 나는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입사 초기에는 그런 날이 있을 때면 아내와 딸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네들이 나의 전화를 귀찮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턴 나는 하루정도 말을 하지 않는 것에는 익숙해져버렸다. 그렇게 사람은 모든 것에 익숙해진다. 어쩌면 당연히 해야 할 것임에도 하지 않음에 익숙해지면 어느새 그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된다. 또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까지 이르고, 그럼 이전에 당연했던 것이 낯설어 지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다. 나는 이제 대화하는 것이 낯설고, 가족에게 전화하는 것이 낯설고, 웃는 것이 낯설고, 우는 것이 낯설다. 어쩌면 나는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계. 이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셈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관리실 문을 열고 마쓰자카가 들어왔다. 그는 말없이 밥 먹는 시늉을 했다. 벌써 점심시간인 모양이었다. 사내식당에서 동료들과 밥을 먹을 때는 그나마 이야기가 조금은 오가곤 한다. 말이 많기로 유명한 히토미가 이야기를 주도 하고, 마쓰자카와 나는 거의 듣는 쪽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체로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들이라 맞장구를 치기에는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일본의 마쯔리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역사서에나 등장할 천황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가 꺼낸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있잖아, 당신들 15년전에 3번용광로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에 대해 좀 알아?” 히토미가 ‘끔찍한’이라는 말을 꺼낼 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3번용광로? 글쎄? 조와 나는 여기 입사한지 10년도 안됐어.” 마쓰자카가 통새우를 씹어대며 말했다. 그는 자신이 먹는 나베요리에만 관심이 있는 듯 했다. “들어보라고. 3번용광로 관리하던 어떤 사람이 끓인 쇳물을 다 부어낸 줄 알고 용광로 위로 올라간 모양이야. 그런데, 쇳물이 조금 남아있었지.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버튼식이 아니라, 레버식이라 용광로 위에서 레버를 힘들게 당겼지, 용광로 닫개가 열리고 남은 쇳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레버를 당기다가 중심을 잃었나봐. 그래서 그 남은 쇳물 위로 추락을 했는데......” “했는데?” 나베요리에만 신경이 팔려있던 마쓰자카가 어느새 히토미를 재촉하고 있었다. “쇳물이 많았으면 그대로 다 녹아버렸겠지. 그런데 쇳물이 조금밖에 없어서 더 끔찍했던 모양이야. 그 사람의 하반신이 쇳물에 녹아 사라지고, 장기들이 쏟아졌어. 그리고 난 후에 인체를 연료로 해서 불길이 치솟았지, 하반신은 용광로에 녹아사라지고, 상반신은 숯 더미가 돼버렸나 봐.”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고?” 내가 물었다. 그러자 히토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뾰족한 덧니가 드러나 보였다. “신고를 했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가까이 가겠어? 이봐 조. 이건 타테마에랑 관계없어. 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사람은 누구든 위험에 쳐하면 이성적이게 되는 법이야. 그 사람이 내 가족도 아닌데, 어떻게 쇳물로 뛰어들겠어?” 그녀는 내 의중을 읽었는지, 묻지도 않은 말까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근데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낸 이유가 뭐야?” 마쓰자카가 잔뜩 표정을 찌푸린 채 물었다. “미안, 식욕이 좀 떨어지는 이야기였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뭐겠어. 어제부로 마나부씨가 사직서를 냈어.” 마나부. 요시다 마나부. 학창시절 스모선수로 이름을 날렸다던 그는 그런 과거에 걸맞게 덩치가 산만한 남자였다. 그러나 성격은 의외로 부드러워서 입가에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낙천적인 성격 탓에 화를 내는 것을 본 적도 없고, 회사에 어떠한 불만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마나부씨가 왜?” “마나부씨가 3번 용광로 관리자였잖아.”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히토미가 실소를 터트리면서 말했다. “이봐, 이 친구들 진짜 관심이 너무 없는거 아냐? 3번 용광로 담당자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생각을 해보라고. 너희가 입사한 후로도 다섯 번은 더 바뀌었을걸?” 히토미의 말이 사실이었다. 마나부씨는 다른 제철소에서 스카웃되어 3번 용광로로 편입된 사람이었고, 그 전에도 이상하리만치 3번용광로에는 신입들이 아닌 경력자들이 편입되곤 했다. 대체로 그들은 다른 제철소에서 스카웃되어 오는 편이었는데, 경력이 쌓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직서를 내곤 했다. “관심이 없어서 몰랐군.” 마쓰자카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음에도 우리는 그간 왜 신경조차 쓰지 못했을까. 분명 이것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성 때문이리라. 남의 일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일본인들이라면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아무튼 중요한건 지금부터야. 그 사람들이 왜 사직을 했겠어. 제철소에 이상한 소문이 돈 것은 마나부씨가 사직서를 내면서 사장에게 한말을 요시다가 우연히 듣고 난 후 부터야. 요시다 말을 빌리자면 이래. 마나부씨가 사색이 되어가지고 사장실에 찾아가서 사직서를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대. 더 이상 여기서 일을 못합니다. 여기서 일하다간 ‘그 사람’ 꼴이 되고 말거에요. 밤마다 나타난다구요. 나타나서는 나보고 도와달라고 해요.” “뭐가 나타난다는 거야?” 마쓰자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뭐겠어. 유령이지! 15년전에 3번용광로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 말야. 히토미가 말하자 마쓰자카가 피식웃었다. “이봐 히토미, 공포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요즘 세상에 유령이 어딨어. 아무튼 링이나 주온 같은 영화가 괜히 이상한 걸 퍼트려가지고. 그리고 말야, 요시다 그 녀석 허풍쟁이로 유명하잖아.” 요시다는 사장의 비서직을 맡고 있는 청년이었다. 마쓰자카의 말대로 그는 허풍을 잘 떨었는데, 그건 아마 그가 전직 소설가이기 때문일 법도 했다. 워낙에 이야기 지어내는데 소질이 있는지라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 사실 같았지만 모두 거짓이었다. 그래서 사내에서 그의 별명은 우소츠키(거짓말쟁이)였다. “몰라, 아무튼 그런 이야기도 있고, 가장 중요한건 사장이 내건 공고야. 이번엔 3번 용광로 관리자를 기존의 직원 중에서 뽑을 모양이야.” 히토미가 한말에 방금까지 히토미를 비웃던 마쓰자카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히토미는 그 모습을 보며 소리 내어 깔깔거렸다. 그러나 마쓰자카의 걱정은 기우였는지도 모른다. 3번 용광로의 차기 관리자는 내가 당첨 돼버렸으니 말이다. 사장은 점심시간이 끝난 직후에 관리실에 찾아와 거의 통보식으로 말했다. “조, 요새 자주 출근이 늦잖아. 3번관리실은 여기보다 좀 덜 머니까 자네가 하는 게 어때? 임원들 입에서도 자네에게 패널티가 좀 가야 하는거 아니냐는 말도 있고 말야.”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일찌감치 3번용광로 관리실 키를 나에게 던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로부터 5분도 지나지 않아 마쓰자카가 짐을 잔뜩 들고는 관리실로 찾아왔다. “내가 4번 용광로 관리실을 맡게 됐어. 아마 내 관리실에는 신입이 들어올 모양이야. 미안해 조.”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작은 짐 꾸러미를 챙겨 3번 용광로 관리실로 향했다. 3번 용광로는 4번 관리실에서 약 15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공장의 외곽에 위치해서 사방이 환할 때도 그 곳엔 볕이 들지 않았다. 관리실에 다다르자, 어쩐지 나만 외톨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용광로는 여느 용광로와 다를 바가 없었고, 관리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히토미가 말했듯이 용광로 위에 구식 레버가 여전히 달려있는 것은 다른 곳과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다. ‘저기에서 떨어지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밑에는 끓어오르는 화마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열기에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지경인데 상상조차 하기 싫어졌다. 관리실에 들어선 나는 내 짐을 풀기 시작했다. 4번에서 3번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달라진 건 전혀 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오후근무도 대체로 순조로웠다. 용광로는 아무 이상 없이 쇳물을 끓여냈고, 또 비워냈다. 식힌 쇳물은 라인을 따라 이동했고, 다시 용광로에 쇳물을 채워지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용광로 닫개를 여는 버튼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파란색 버튼은 아무리 눌러대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단순한 LED문제라 생각했지만 용광로에서 쇳물이 빠져나가지 않는지 표시등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순간 구식 레버가 눈에 들어왔다. ‘구식레버를 당기다가 중심을 잃고......’ 점심시간에 히토미가 말하던 내용이 갑자기 뇌리를 스쳤다. 찝찝했지만 올라가야 할 터였다. 안전장비를 갖춘 채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사다리는 녹이 슬어 눅눅했다. 옆으로 용광로의 열기가 뺨에 전해졌는데, 오히려 열기 때문인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다리를 다 올라서자, 철제 난간이 이어졌다. 멀리서 불그스름하게 끓어오르는 용광로의 윗부분이 악마의 아귀처럼 보였다. 항상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곤 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구식 레버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자 비로소 나는 용광로 위에 서있었다. 이대로 난간이 무너지거나 하면 떨어질 테지만, 난간에 안전고리를 맨 이상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구식 레버는 제법 묵직했다. 아래로 당기는 방식으로 닫개를 여는 것이었는데, 자꾸 뭐에 걸린 듯 틱틱 거리기만 할 뿐,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이게 왜 이러지......” 완력을 다해 아래로 당기려는데 그때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도와줘......” 나는 귀를 의심했다. 소리는 용광로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용광로의 쇳물은 반쯤 열린 닫개를 비집고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쇳물이 빠져나갈수록 그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도와줘!” 쇳물이 용광로의 반을 빠져나가자 믿을 수 없는 것이 용광로 바닥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불가마처럼 끓어오르는 쇳물사이로 주황빛으로 불타오르는 형상이 꾸물꾸물 움직이며 용광로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 개의 팔로 용광로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는데, 전설 속에 나오는 샐러맨더가 실존한다면 딱 그 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단지 뒷다리가 없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벽을 기어오르던 그 것은 미끄러졌다, 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결코 용광로를 끝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도와주세요!” 그것이 입을 들썩 거릴 때마다 참기 힘든 열기가 훅 끼쳤다. 그러나 그 것은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집에, 집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그 말을 듣고는 나는 이성을 잃었다. 용광로 끝에 있는 구식 막대를 집었다. 오래전 쇳물이 잘 녹지 않을 때 휘젓던 용도로 쓰던 막대였다. 방열장갑을 낀 손으로 그 막대를 용광로 안으로 들이 밀어 넣었다. 그 것은 내가 내려준 막대를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것이 막대를 타고 오를수록 참을 수 없는 열기가 더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 막대를 놓을 수가 없었다. 가족을 향한 그의 집념이 나와 닮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귀신이든, 환상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그 것이 막대를 어느 정도 타고 기어오르자 불길에 가려져있던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그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 눈물은 용암처럼 붉고 뜨거웠다. 열기가 너무 심해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것이 거의 끝까지 올라왔을 때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멀어져가는 의식 끝에서 마쓰자카의 음성이 들린 것도 같았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사내 응급처치 실에 누여져 있었다. 내 곁에 마쓰자카가 몸을 옹송그리고 졸고 있었다. 마쓰자카는 내 뒤척임에 졸음이 달아났는지 큰 소리로 말했다. “이봐, 조! 정신이 들어?!” “어떻게 된 거야......” “자네 죽을 뻔 했어! 거긴 도대체 왜 올라간 거야? ” “닫개가 안 열려서......레버로 열려고.” “무슨 소리야 레버는 없어! 자네가 안전고리를 맨 채 난간에 매달려 있는 걸 보고 내가 뛰어가서 안 구했으면 아마 자네는 공중에 뜬 채 불이 붙었을 거라고!” 마쓰자카가 눈시울을 붉히며 열변을 토했다. 그는 두 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손은 왜......” “별 거 아냐. 아무튼 다행이야. 윗선에서 3번 용광로에서 자꾸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이번에 제대로 폐쇄를 논의할거래.” 나는 그날 집에 와서 마쓰자카의 행동을 곱씹었다. 아마 두 손에 칭칭 감은 붕대는 화상 때문 이었으리라. 그럼 그가 나를 구하고 화상을 입었고, 내가 걱정되어 눈시울을 붉혔단 말인가. 어쩌면 내가 이 나라를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문화 타테마에에 편승해 사람의 진심을 곡해서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고, 호의마저 왜곡시키려 들었는지도 모른다.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의 목소리가 아침과 비교해서 조금 부드러워져있었다. “회사 생활 힘들지 않아요?” 간만에 들어보는 안부 인사였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인사에 나는 문득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 뭐 힘들게 뭐가 있어. 매일 하던 일인걸......” “아침에 화내서 미안해요. 내가 그러면 안 되는데 당신 힘들게 우리 위해서 힘내주고 있는데...... 미안해요.” 아내의 그 말을 듣는데,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 것을 훔쳐낼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흘려내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까지 쌓였던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냐. 당신에게 속상한 거 없어.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마.” “민선이 민영이도 아빠목소리 듣고 싶다네. 잠시만.” 이윽고 그리웠던 딸들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아빠! 보고싶어요. 아빠 잘 계시죠?” “응, 우리 큰딸 잘 있지? 필요한 건 없고?” “우린 괜찮아요. 그보다 아빠 오늘 생신이시잖아요. 우리가 선물 보냈는데, 아직 안 갔어요?” 그제야 아침에 택배기사와 마주쳤던 사실이 떠올랐다. 신발장 근처에 아무렇게나 놓인 상자를 집어 들었다. 발신자 명에 딸아이들 이름과 아내의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나는 천천히 박스를 개봉했다. 혹시나 내용물이 다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자 그 속에 들어 있던 작은 앨범 하나가 드러났다. 앨범을 열자, 나는 또 한 번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5년간 아내와 딸아이들이 찍은 사진들이었다.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서도 나와 함께 하는 척 세 사람의 사진들 사이에는 한 명분의 공간이 존재했다. 마치 내 자리를 항상 비워두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집에, 집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용광로 귀신의 그 말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아마 내가 이 타국 땅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그 곳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용광로 귀신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후련하다. 앞으로의 삶이 더욱 고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살아있는 사람이고,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듯 했다. 그래 나는 살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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